〈까불지마>란 보통 가스조심, 불조심, 지퍼조심, 마누라 조심의 머리글자로 수년 전부터 시중에 돌아다니던 말이다. 그러나 최근 나는 이 글자들로 나의 건망증을 조금이나마 보상할 수 있는 생활수칙의 표어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내가 만든〈까불지마>의 <까>는 까먹지 마, 가스조심!' 이고,<불>은 불조심!' 과 불평 마!' 이다. <지>는 지갑과 함께 키를 꼭 챙기라고 지갑조심!'으로 기억한다. 점점 비만해져가는 나의 몸을 생각하여 지방조심!' 도 함께 떠올린다. <마>는 나이가 들면서 잘 미끄러지는 것을 조심하기 위해서 마루조심!' , 그리고 허둥대다 사고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마음을 느긋하게!'로 기억한다. 매일 아침마다 출근 전에 ‘나이 들어 <까불지마!>' 라는 주문을 외우면서 나를 점검하는 것이다. 먼저 가스 불을 잠그고, 모든 전등을 소등한 후, 지갑과 키를 챙기고, 허둥대다 혹시 빠트린 것은 없나를 모두 점검한 후에야 집을 나선다.
  우선 〈까>의 까먹지 마, 가스조심!'은 최근 나의 수신 제일 조가 되고 있다. 아이들도 모두 제 갈 길로 나가고, 최근 30여 년 동 안 우리 집에서 도우미로 일해 준 아주머니마저 나이가 들어 시골로 내려간 후 집에는 우리 내외만 달랑 남았다. 내외 중 한 사람이 먼저 나가고 나면 한 사람만 홀로 남는다. 아내가 외출이라도 하게 되면 나 혼자 남는 것이니 이젠 나도 여러 가지 가사 일에 있어서 홀로서기를 연습해야 한다. 혼자서 음식이라도 먹을라치면 우선 시작은 가스불이나 오븐을 켜서 음식을 데워먹는 일이다. 그런데 켜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하는데, 간혹 끄는 걸 깜빡할 때가 있다. 혼자서 물이나 음식을 끓이다가 끄는 걸 잊어버리는 바람에 음식이나 냄비를 태워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조금만 늦었더라면 화재로 이어질 뻔했던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도 했었으니 가스조심 이야말로 내가 즐겁게 오래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수칙이 되어버렸다.
   가스 불 끄는 것 말고도, 잘 잊어버리고 덤벙대는 나의 성격은 또 다른 사고를 치기도 한다. 얼마 전 교회 앞에서 주차장에 내 차를 잘 세워놓고 걸어오는데 차를 정리해주시는 집사님이 “차에서 소리가 나는데요?" 하신다. 놀라서 달려가 보니 시동을 켜놓고 키도 꽂아둔 채 주차를 해놓았던 것이다.
   또 어느 날엔가는 모처럼 평소에는 잘하지 않는 넥타이차림의 정장을 하고 교회엘 갔더니 모두들 내 차림새를 보고는 박장대소를 한다. 모든 교인들이 운동복 차림인데, 오로지 목사님 나만 넥타이까지 맨 정장차림이다. 그날이 교회 운동회 날이라는 걸 깜빡 잊고는 혼자서만 넥타이 자랑을 한 셈이었다. "교회엘 자주 빠지시니 정보에 어두울 수밖에요! 그런데 오늘은 평소에 안 매던 타이까지 매고 오셨네요!" 하고 한 교우가 빼딱한 소리를 하지만, 어쩔 것이냐? 모든게 내 잘못인 것을...
   <불>은 나이가 들면서 더해지는 '불조심!' 걱정 때문이었다. 혼자서 끼니를 해결한다면서 가스 불에 무언가를 얹어놓고는 잠깐 한눈을 팔거나 조는 동안에 음식을 끓이던 냄비까지 검게 태워 못 쓰게 만들어 버릴 때도 있었다. 더욱 위험한 경우는 음식이 끓어 넘쳐서 불은 넘치는 물에 꺼졌지만 가스는 계속 새어나오는 경우 이다. 그걸 모르고 잘못하여 다시 불을 붙이는 순간 퍼져있던 가스에 불이 붙으면 큰 화재의 위험으로 닥칠 수도 있다. 불은 순식간에 생명과 재산 등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리니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그리고 전등불도 필요 없이 켜두고 나가면 우리 부부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도 끌 사람이 없다. 며칠 여행이라도 다녀올 경우에는 아무 쓸데없이 불필요한 에너지만 낭비하게 되니 문단속 하듯이 등단속도 꼭 해야만 하는 일이 되었다.
 〈불>은 '불조심' 을 뜻하기도 하지만, ‘불평 마’의 뜻도 있다. 나이가 드니 세상사 모든 일이 내 맘 같지 않고, 심지어 마음에 드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어쩌랴? 그런 일에 일일이 마음을 쓰고, 시비를 건다면 내 정신 건강만 다치게 되는 것을, 눈과 귀를 막고 세상사에 불평 없이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무엇이든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지공거사 쯤 되는 나이 가 되고 보니 이제야 겨우 체득한 생활의 지혜다.
   그런가 하면 <지>에서 바로 떠올리는 것은 ‘지갑 조심!' 이다. 건망증 때문인지 출근한다고 집을 나서서는 한참을 가다가 지갑과 키를 갖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어떤 때는 차 앞에까지 와서야 비로소 차 키를 두고 왔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혼자 서글퍼질 때도 있다. 흘리고 다니는 것이 어디 꼭 지갑과 키뿐 이겠는가? 물건이든 약속이든 간에 무엇이든 잊어버리지 말자는 뜻에서 모든 것을 뭉뚱그려서 ’지갑 조심'이라는 한마디로 기억 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덧붙여서 또 지방조심!'이 떠오른 이유는 내가 비만이기 때문이다. 먹는 음식을 조심하고 열심히 운동하자는 다짐도 <지>에 담긴 나 자신과의 약속이다.
  원래 시중에 떠돌던 <까불지마>의<지>는 ‘지퍼조심’ 이었다. 늙어가면서 살매[살짝 치매]가 있는 노인은 “지퍼 올리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고, 젊은이는 “지퍼를 아무 곳에서나 내리지 말라는 뜻이라는데, 나 또한 지퍼 올리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나이가 되었으니 <지>에 담긴 뜻은 참 여러가지로구나. 마지막으로 <마>에서는 마루조심!' 을 바로 생각하게 한다. 내가 정형외과를 하다 보니 많은 노인들이 마루나 마당에서 미끄러져 대퇴골 경부골절로 장기간 고생을 하면서 어떤 환자들은 인공관절 수술을 요하는 경우도 있고 심한 경우에는 목숨을 잃는 환자들도 더러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 우리 병원에서 경골 수 술 후 퇴원을 하루 앞둔 한 할머니 환자가 복도에서 넘어져 더 심한 대퇴골 경부 골절을 당한 경우가 있어 내가 심한 괴로움을 당하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친구와 노래방에 갔다가 친구가 취중에 마이크 줄에 걸려 넘어져 심한 골절상을 당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과는 달리 이제 나이가 들어서 어디서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치명 적일 수도 있으니 <마>자만 나와도 가슴이 서늘해지고 ‘마루조심’ ‘마당조심' 이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
. 시중에 돌아다니는 농담으로서의<마>도 별로 유쾌한 것은 아니다. ‘마누라 조심’, , 즉 늙어 힘없으면 마누라가 남편 두고 도망갈까 조심하라"라는 뜻이라니 그 농을 듣고 따라 웃어주긴 해도 실제로 지공처사인 우리들에겐 마음이 저려오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러니 나도 그런 불행을 미연에 막기 위해서 마누라에게 위의 "<불> 평 마!‘' 를 특히 더 잘 지키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다.
  나이가 들어서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건망증을 나라고 어떻게 피할수가 있겠나? 흐르는 세월을 탓할 게 아니라 이제 나처럼 ,까불지마>를 외우면서 살아갈 도리밖엔 다른 방도가 없다. 다른 사람들은 또 어떤 자기만의 <까불지마>를 만들고 있을까?
 그저 조심, 또 조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