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천뉴스 노익희 편집국장

  벌써 35년 전의 일이다. 군 입대를 위해 까까머리를 하고 신병교육대에서 교육을 받았다. 곱게 길러 애지중지하던 머리카락을 자르고 오로지 명령에 움직여야만 했던 몇 주간의 교육을 끝낸 우리는 깊은 노을이 지는 넓은 연병장에서 석별(惜別)의 정을 나누고 있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 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연병장에 울려 퍼지던 한 친구의 노래에 이백 여명이나 되던 동기들은 모두들 그야말로 펑펑 눈물을 흘렸었다. 평생에 그렇게나 서럽고 슬프게 부끄러움을 모르고 오래 운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무것도 모르고 훈련을 받던 청춘의 설움에 감정의 마그마를 터뜨려 버린 시월의 영향이었던 것이다.

시월(十月)은 그 소리에 따라 적기 때문에 속음으로 표기되는 달이어서 그런지 일 년 중에 감성이 가장 풍부해 지는 달이기도 하고 결혼의 계절이기도 하다. 새로운 출발을 하는 청춘남녀들이 가정을 이루는 시작을 가장 많이 하는 것도 많은 사람들이 미학적인 견지에서 시월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멜로장르에 있어 독보적인 영화 <시월애>도 완성된 가을의 감성을 가미해 해피엔딩으로 스토리를 그려내 박수를 받았었다.

대개 만추(晩秋)는 늦은 가을을 말하지만 웬지 가을이 가득 찬 만추(滿秋)로 해석하는 것이 어울리기도 한다. 더욱이 가을로 가득 찬 이 때 시월이 막바지로 가고 있으니 너나 할 것 없이 알 수 없는 그리움과 회한이 있을 것이다. 귀향을 권하던 친구들과 한 세상 살아가는 것이 왜이리도 힘든 것인가? 라는 물음으로 여생을 버거워 하시는 백세를 육년 남기신 노모를 찾아 돌아 온 고향은 아직도 타향에 익숙한 필자에게는 야릇하기만 하다.

‘가을에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낙엽이 쌓인 거리를 걷노라면 우수에 쌓여 누구나 옛 동무를 그리워하고 옛 시절을 추억하게 될 것이다.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의 노랫말처럼 시월은 축제가 한창이다. 도시마다 지역마다 동네마다 골목어귀에까지 축제와 행사로 가득한 '사람들의 축제'가 끝나면 아름다운 '자연의 축제'가 이어지게 될 것이다. 억새, 갈대, 국화, 단풍, 바다와 산…, 시월이 가을의 정점을 찍는 이유가 확실해 지는 대목이다.

35년 전 군대동기의 노래를 들으며 펑펑 울던 진한 기억들, 서예를 가르쳐 주고 글을 일러 인생을 잡아 주었던 소헌 선생님의 목소리, 두동과 성남동의 조용한 갤러리에서 환하게 언제나 반겨주던 거람과 혜암의 따뜻함, 가을로 가득 찬 만추에 가 보았던 밀양 표충사의 절경,

너는 마음이 약해서 그게 마음에 안든다면서도 항상 다독여 주던 성우의 우정이, 짧지만 아름답게 찾아 왔다 가버리는 가을의 나비들이, 전방이라 벌써 영하 5도라고 나라를 지키면서도 씩씩해져 버린 쌍둥이 아들 이함이와 이람이가, 언제라도 무슨 일이 일어나면 금방이라도 달려 와 줄 나에게는 천사와 같은 누이의 다정한 미소가,  신촌에서 낯 익은 푸르른 청춘들을 보며 늙어 가는 것을 느낀다는 사랑하는 사람의 익어가는 주름이 시월애(十月愛)를 더욱 깊어만 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