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로요?”
 두 번째로 만나는 젊은 의사가 주사를 놓아 달라는 내 말에 대뜸 내뱉은 말이었다.
 “?”
 공짜로라니? 의사의 말이 하도 뜻밖이어서 잠시 우두망찰 당황스러웠다.
 무릎이나 허리가 아플 때마다 이용하던 정형외과의원으로, 원장이 바뀐 뒤 전날에 이어 두 번째로 찾은 터였다. 그 동안 물리치료와 함께 소염진통제인 주사를 맞았었기 때문에  당연한 수순으로 생각했고, 아무 모션이 없는 것은 깜박 잊어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말이었는데, 삽시간에 나는 공짜를 좋아하는 경우 없는 늙은이가 되어버렸다. 그럼 이전의 원장은 손해를 감수하며 공짜로 주사를 놓아 주었나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무안한 김에 얼떨결에 다시 부탁해 주사를 한 대 얻어맞긴 했는데, 모욕감과 함께 불쾌한 느낌이 집에 다 오도록 끈적거렸다. 비용이 들면 청구하면 되고, 맞아도 소용 없는 효과 없는 주사라면 친절히 설명해 주면 될 일이었다. 정 많이 아프면 통증 완화 주사를 맞으라는 젊은 의사의 냉정한 입매와 눈길은 내가 노인이어서 든 자격지심이겠거니 하면서도 영 개운하지 않았다. 여간 아프지 않고는 다시 찾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아마도 적중하지 싶다.

 동네 자치회관에서 한 주일에 두 번 오전에 문인화를 배우고 있는 지가 이 년여다. 관심사가 같은 나이 지긋한 사람들의 자아 개발성 취미활동이다.
 우리 시간이 끝나면 오후에는 ‘밸리댄스’가 같은 장소에서 있는데, 착화(着靴)건으로 신경이 쓰이게 한다. 자기들은 맨발로 활동하니 우리에게 구두를 벗고 실내화를 신으라고 강권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덧신을 사물(私物)로 가지고 다니거나 비치되어 있는 슬리퍼를 이용해야 하는데, 귀찮을 뿐 아니라 공용 슬리퍼를 이용하는 게 어쩐지 꺼림칙하고 유쾌하지 않다. 나는 구두 위에 비닐 싸개를 덧신는 쪽을 택하고 있는데, 그 때마다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발바닥이 더러워질 걸 염려하는 쪽에서 덧버선을 신어 해결하거나, 아니면 걸레질을 해서 저들이 필요로 하는 마루바닥의 청결을 스스로 유지하는 게 맞다고 말이다.
 그러잖아도 불편한 상황을 감내하고 있는 터에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시(詩)를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p회원과 빈 강의실 한 쪽에 앉아 담소하다가 일찍 나타난 밸리댄스 회원에게 딱 걸려버린 것이다. 그녀는 우리의 발부터 보았는지 방에 들어서자마자 신경질적으로 대뜸 “구두 벗으세요!” 했다. 나는 얼떨결에 일어나며 “가려고 신은 거예요” 했지만 속으로는 여간 구차스러운 게 아니었다. 불쾌해진 p가 방을 나서며 자칫 문을 세게 닫는구나 생각되는 순간 벌컥 문이 다시 열리며 “예의 좀 갖추세요!” 독 오른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나이 많은 어른에게 그리 말하는 건 예의냐는 p의 항변에 “나이 값을 해요! 나이 값을!!” 다시 뒤통수에 날아 온 강 펀치. 졸지에 물벼락을 맞은 꼴이었다. 불편을 강요하는 쪽에 정중한 언사의 부탁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이건 너무나 몰염치한 적반하장이었다.
 p의 팔을 끌고 서둘러 돌아오는 길, 나는 ‘나이 값’이란 말에 천착했다. 어떤 게 나이 값인가. 어떻게 하는 게 나이 값을 하며 사는 것인가.

 장을 보러 갈 때 물목을 메모해 가지고 가는 것은 오래된 나의 습관이다. 사야 할 물건을 빠뜨리거나 충동구매를 하지 않기 위한 나름의 방편이다. 일 주일에 한 번씩 아파트 단지에서 열리는 알뜰장에서 예의 메모지를 살피는데, 야채를 팔던 청년이 내 메모지를 들여다보며 “이거 할머니가 쓴 거예요?” 한다. 나는 어리둥절해 하며 그렇다니까 그 청년이 다시 “어휴!” 한다. 나는 그 때서야 알아차렸다. 집안에서의 차림 그대로 헙수룩한 내 몰골이 글을 안다는 게 신기했던 모양이다.
 
 대체로 사회 통념이 그렇다. 노인 그 중에도 할머니들은 무식하다고 말이다. 무식하고 무례하고 무경우하다고 치부되기 일쑤다.
 남성 우위의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다만 가사(家事)의 도우미 혹은 그 가정의 재화(財貨)를 위한 노동력으로만 치부되어 딸들에겐 아예 교육 기회가 거의 없었던 예전의 일을 생각하면, 오늘의 할머니들 중 많은 사람이 무식할 수 있다. 하지만 교육을 못 받아 무식할 수는 있어도 다 무례하고 무경우하다고 뭉뚱그려 매도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성의 문제인 것이다. 젊은 사람 중에도 특히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 중에도 경우 없고 무례한 이기적인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나는 어지간히 아프지 않으면 병원엘 잘 가지 않는다. 정형외과의원도 마찬가지다. 적지 않은 금액의 개인 건강보험금을 다달이 꼬박꼬박 내고 있지만, 당장엔 천 오백 원 들고 가서 물리치료랑 이것 저것 처치 받고 오는 게 미안쩍어서다. 이사 간 전 원장에게 그리 말한 적이 있었는데, 미안하긴 뭐가 미안하냐고, 안 오는 게 더 미안한 거라고 해서 웃은 적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졸지에 무안을 당하고 상처를 입었다.
 남에게 폐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쿨하고 멋진 노인이고 싶지만, 오늘날 이 사회에 만연된 노인들에게 덧씌워진 편견이나 고정관념에서 도저히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깨닫는다. 경우랑 예의가 있고 없고를 떠나 나이 많음 자체가 원죄인 듯하여 ‘나이 값’을 하라는 호통에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한동안 허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정녕 장수(長壽)가 재앙이다. 목울대를 넘어오는 ‘모두가 늙는다’는 말은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