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의 막이 올라가고 조명은 주인공을 따라 밝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움직인다. 밝은 조명 탓에 어둠이 두드러지는 무대 뒤쪽으로 어둑신한 그림자가 지나가고 또 지나간다. 아마 예닐곱 사람쯤 되는 것 같다. 사람 수에 특별한 의미가 있어 보이지도 않고, 무대 구성상 그런 설정이 없어도 무방할 것 같다. 단원 모두에게 역할을 주어야 하는 연출자의 고육지책일까 하면서, 마지막으로 지나간 배우의 뒷모습을 따라 내 상념은 무대를 떠나고 있었다.

 늦가을 햇살이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빛나던 모교의 교정에서 나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십 대의 마지막 날들을 하루하루 지워가고 있었다. 아주 감상적이 되어 결코 붙들 수 없는 스물의 기억들을 아쉬워하던 그 중 한 날,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체험을 했다. 너른  캠퍼스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의 호의적인 시선이 내가 아닌 옆의 동료에게 꽂히는 것을 민감하게 찰나적으로 알아챈 것이다. 그 날이 수십 년 세월이 지나도록 잊히지 않는 것은, 우스운 얘기지만 그 때까지 나는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여길 정도로 치기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내가 있는데도 다른 여성이 먼저 인사를 받고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나만 몰랐지 그 때 나는 이미 조사(照射) 범위를 벗어난 주변부에 있었던 것이다.
 무대 혹은 드라마에서 집중적인 조명을 받는 주역을 맡는다는 것은 본인의 재능에 덧붙여 숱한 세월의 피나는 훈련과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함은 물론 운(運)도 따라야 될 수 있는 일일 것 같다. 아무리 노력하고 재능이 있어도 걸맞는 역할이 있어야 하고, 수 많은 경쟁자 중에서 뽑히는 행운이 따라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지망자들이 갖은 고생을 하며 애쓰지만 번번이 주인공은 한 두 명 뿐이고, 모두들 조연(助演)으로 만족해야 한다. 여기서 빛나는 조연과 엑스트라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주연만으로 극이 구성될 수 없고 영화가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모두들 주연 같은 중요한 배역을 맡아 자랑스럽고 폼나게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저마다 대기업의 사장이고, 성공한 연예인이고, 국회의원 등 권력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이기만 하면, 즉 주연 같이 화려한 조명을 받는 사람으로만 이 사회가 채워진다면 어떻게 이 사회가 유지되며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학생들에게 자신감을 불러 일으켜 준다며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다!’라고 목청껏 크게 크게 외치게 한 때가 있었다. 이제 생각해 보니 그 때 내 생각이 짧았던 것 같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니 나를 내 마음대로 하겠다며 극단적인 행동을 한다든가, 자신은 주인공이니 그에 맞는 역할을 맡기 위하여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만 들어가겠다고 스스로에게 과부하를 거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뒤늦은 후회를 한다. ‘나는 소중한 의미 있는 사람이다!’ 라고 외치게 했어야 했다. 그래야 자기의 가치를 인정해 자신을 해칠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의미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 맡겨진 일을 성실히 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 같다. 그러면서 작은 성취에 기뻐하고, 자신감을 가지고 다시 도전하여 조금 더 큰 성취를 이루어내며 자신도 발전하고 사회도 발전시키는 이 땅에 없어서 안 될 소중한 사람들이 되었을 것 같다.
 그릇마다 담겨지는 내용물이 다르다. 옹기장이가 그릇을 빚을 때는 그에 담길 내용물을 생각하며 크고 작은 그릇을 빚을 것이다. 종지를 빚으면서 밥이 담기기를 기대하거나 사발을 빚으면서 간장이 담겨 밥상에 올라 있는 모습을 그려 보지는 않을 것 같다. 즉 저마다의 의미 있는 주어진 역할이 있다는 이야기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 싶다. 이 땅에 태어날 때 나름대로의 역할을 맡아 왔을 것 같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를 부러워하거나 혹은 증오만 할 일이 아니다. 내게 맡겨진 흙수저를 어떻게 하면 보다 쓸 모 있는 수저를 만들지를 연구할 일이다.
 어두컴컴한 무대 뒤쪽을 있는 듯 없는 듯 지나가던 예닐곱 번째 배우를 떠올리면서, 아마도 그 배우는 그 역할 하나를 위하여 연습 시간 내내 자리를 지켰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 성실함이 그 배우를 탄탄하게 성장시킬 것이고, 끝내는 무대에서 제일 조명을 많이 받는 중요한 역할도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찮게 보이지만 의미 있는 역할을 그 배우는 하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많아지면서 스스로를 잉여인간 아니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는 짐스러운 존재라며 자괴감(自愧感)에 시달릴 때가 있다. 그러나 완벽하진 않지만 아직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는 육신이다. 마지막으로 맡아야 할 소임 즉 배역이 무엇인지 천착(穿鑿)하면서, 대본 속 ‘행인 6’의 역할도 감지덕지할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