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가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한가로움과 운치와 여백이 공존하던 30년 전의 제주도, 지금은 미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일본인 외 다수의 다국적 사람이 뒤섞여 발 디딜 틈도 없이 와그작대고 있다. 제주공항 역시 우리말과 영어 중국어 일본어가 병기된 안내판이 환한 미소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공항 안에는‘금연 건물 - 적발시 과태료 10만원 부과’라는 안내문도 있다.

 공항 문턱을 넘자 더운 열기가 몸을 확 감쌌다. 렌터카를 타고 야자수와 낮달이 데이트를 하는 도로를 규정 속도로 달렸다. 신호등 앞에서 멈췄다가 출발하는데 상큼한 공기가 더없이 푸른 향기로 유혹하고, 남국의 가로수는 액셀러레이터를 얇게 밟도록 여러 번 권유했다. 그럴 때마다 안도와 평온이 찾아왔다. 교차로에서는 신호등이 호수처럼 맑은 눈빛으로 나와 아들에게 다정하게 윙크를 했다.

 드문드문 마을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유럽풍의 집과 아한대림의 나무와 숲과 빈 들판과 오름(야산)이 가까웠다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기를 한 시간 정도 하는 돌담과 감귤농장이 비자림까지 이어졌다. 문득 신선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바로 그 순간,“아버지 부자지간에 여행을 간다니깐 친구들이 많이 부러워해요. 특히 한 친구는 이해가 안 간다며, 자기는 아버지와의 갈등 때문에 고민이 많다고 하네요.”

 “왜 그럴까 생각해 봤냐.”“깊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지만 수용의 폭이 좁거나 주장이 강해서가 아닐까요, 이해심 부족이라고나 할까요.”“오, 답의 완성도가 높네.”“내가 왜 아버지와 엄마를 좋아하는지 아세요.”“어쭈구리,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네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도 아닌데.”“저의 생각보다 차원 높은 생각으로의 유도와 폭넓은 이해심 때문인데요.”“비행기 태우네.”“오늘 타고 왔잖아요.”“그렇게 이야기가 흘러가나.”
  
 부모는 권위와 위상에, 자식은 존재를 부각시키려는 의식에, 서로의 생각이 상충하는 시기에는 그 관계 안에서 여러 문제가 미미하게 충돌하지만 날선 공방이 무게를 더해가면서 전통적인 구조가 붕괴되고, 봉인됐던 문제들이 분출하면 심각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인식 문제는 매우 중요하며 따라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거나 처방하지 못했을 때는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과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관계 개선의 특효약, 즉 믿음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라는 대화의 끝 무렵에,

 비자림에 도착했다. 아름드리 비자나무 특유의 상큼한 듯 알싸한 듯한 향기에 온몸이 젖어 참 나를 찾은 듯, 걸음을 멈추고 사색에 잠기면 새소리 바람 소리 흙 소리 숲의 소리가 들렸다.“와, 아버지, 이거 아버지 소리 같습니다, 엄마 소리 같기도 하고.”“……”부모와 자식은 소리의 뿌리가 하나인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무심결에 내뱉는 한마디가 가슴을 뜨겁게 꾹 찌른다. 이번 여행에서 부자학(夫子學)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옷을 입을 때 끼워야 하는 첫 단추와 마지막 단추를 가지런히 끼웠다는 것에 스스로 만족하면서,

 늦은 시간 동문시장 2층 어느 횟집에 앉았다. 아들이 먹고 싶어 하는 어종으로 식탁이 꾸며졌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제주도 여행에서부터 며느리가 될 아들의 여자 이야기로 이어졌다.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어 가는데 주인이 다가와서“부하가 상사를 모시고 온줄 알았는데, 아버지와 아들 사이군요. 이런 풍경 처음 봅니다. 마감 시간이 9시 30분인데 30분 더 연장해서 10시로 해드릴 테니 즐거운 시간되시길 바랍니다.”해 저문 봄날, 수족관의 물고기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지성으로 성장하는 마음속 울림이 크다. 죽기까지 이어질 것 같다. 모든 별들이 농악대처럼 골목을 누비는 그런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