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정 숙

 우연히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리다 드라마의 한 장면에 눈길이 멈췄다.
 서로 사랑해 결혼하려는 손자 손녀를 각각 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이들을 매개로 수십 년 만에 만나게 된 모양인데, 젊은 날에 이루지 못한 그들의 사랑을 다시 이어 보려는 장면이었다. 아니, 조금 더 설명하자면, 각각 독신인 노인 중 할머니는 손자의 사랑을 희생시킬 수 없다며 할아버지와의 만남을 망설이고, 할아버지는 자신들의 인생과 사랑이 더 중요하다면서 늦었지만 이제라도 할머니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겠다면서 그들 손자녀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장면이었다.
 노인의 사랑을 다룬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많은 관객을 모으며 공전의 히트를 치고, 노인의 재혼문제가 심심치 않게 인구에 회자되는 이즈음이니, 그런 드라마의 설정도 있을 수 있겠다 싶긴 했다. 허나 할머니의 입장이라든가 심경이나 가족 간의 화목 등 관계는 생각지 않고 막무가내 고집을 부리는 할아버지에게선 ‘사랑’과는 거리가 먼 흉측한 욕심과 아집(我執)만 내비쳐 보였다. 노인인 내게조차 추하게 보이던 할아버지의 집착을 젊은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민망했다. 
 무슨 연유였든 사랑하는 이와 운명이 엇갈려 부부의 인연을 맺지 못하고 한평생 그리워하며 가슴에 묻고 지내다, 인생을 마감하기 전에 다시 우연찮게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남녀 간에 나름 큰 행운이라고 생각된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지 않을까 생각되어서다. 홍안(紅顔)의 미소년 소녀들이 백발이 성성해 만나 서로의 안위를 묻고, 공통의 기억을 되살려내 추억하고, 살아 온 날의 이야기를 허물없이 그리고 이해타산 없이 주고 받는 광경은, 노인들의 어설픈(?) 사랑 타령보다 훨씬 흐뭇하고 아름답게 보일 것 같다. 물론 내 편견일 수도 있다.
 사랑은 관심이고 배려(配慮)다. 받기보다 주는 게 더 값지다. 사랑이 지극할 때 저절로 우러나오는 마음가짐이랑 언행은 초점이 오로지 상대방에게 맞춰져 있는 이타적(利他的)인 행위이다. 자기 생각과 주장을 일방적으로 내세운다면 거기에는 이미 사랑은 없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노인의 사랑은, 젊은이도 그렇지만, 특히 저돌적이거나 계산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노욕(老慾)이 승한 집착으로 비쳐 추하기 때문이다. 세심한 마음 씀으로 상대를 편안하게 하고, 은근한 정을 표시하는 것으로 족하다. 내 뜻대로 따라와 주지 않는다고 상대를 괴롭히고, 온갖 말로 저주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고 악의적인 소유욕 내지 정복욕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드라마 속의 할아버지에게서는 상대에 대한 배려란 아예 없어 보였다.  
 흔히 사람들은 사랑과 집착을 혼동한다. 사랑은 관심이라지만 관심이 지나쳐 일거수일투족 참견하고 간섭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병적인 집착인 것 같다. 어쩌면 자신의 열등감을 가리기 위한 본능적인 방어기제일지 모른다. 집착을 사랑인 줄 착각하여 결혼했다가 실패한 경우를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보았다. 의처증 혹은 의부증은 집착이 강한 사람 중에서 많이 발견된다. 집착이 강한 사람일수록 근거 없는 박탈감과 열등감에 시달리고, 극심한 좌절감으로 인생 자체를 그르치기도 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랑’이라는 단어를 쉽게 입에 올리곤 한다. ‘사랑’이란 말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고결하고, 범접 못할 숭고하기조차 한 신의 영역에 속하는 개념이라고 생각된다. 독생자 예수를 값없이 내어준 하느님의 사랑이나, 자식을 위해 온갖 희생을 마다 않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친구 간에 혹은 남녀 간에 아름답고 헌신적인 사랑은 얼마든지 있다. 더러운 욕망이나 그릇된 집착을 ‘사랑’이라 포장하여 저도 속고 남도 속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랑이 변하면 미움이 된다지만, 그것은 애당초 진정으로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뜻일 듯하다.
 드라마 속의 할아버지가 끝내 손자녀의 결혼을 훼방하며 자기 고집을 관철했는지의 여부는 그 드라마를 계속 보지 않아 알 수 없다. 하지만, 작가가 노인들의 사랑이 더 이상 욕되지 않도록, 세속적인 애증(愛憎)과 소유욕을 벗어난 훈훈하고 사려 깊고 진정으로 상대방을 사랑하는 따듯한 심성의 할아버지로 묘사해, 노년의 사랑을 아름답고 품위 있게 가꿔보고 싶은 세상의 모든 노인들에게 본을 보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