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노인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한다. 자식을 다 키워 짝 채워 내보내고, 살림을 일구고 꾸려가는 등의 절박한 현업(現業)에서 벗어나 한가롭기는 한데 특별히 할 일이 없거나, 혹은 무슨 일을 하려 해도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별수 없이 우두커니 앉아 지나온 세월만을 되씹어 본다는 뜻일 것이다.
 
 아슴푸레한 기억 속에 켜켜이 쟁여 있는 사연들은 실제보다 더 아름답고 절실하게 윤색되기 마련이다. 이미 지나가버려 내 것일 수 없는 그 시절의 나, 더 이상 내 힘으로 어째 볼 수 없는 그 때 그 상황이, 때로는 아련한 그리움으로 혹은 가슴 저며지는 회한으로 다가와 머리 속을 뒤흔들고 가슴을 아프게 두드려 댐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때로는 기쁘게, 또 때로는 슬프게, 살아온 삶의 역정이나 현재의 처지에 따라 추억은 다른 빛깔로 다가오지 싶다.
 거칠 것 없이 즐겁기만 하던 동심(童心)의 어린 날들, 사랑을 앓으며 잠 못 들던 청춘 시절, 금맥(金脈)을 찾던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만큼 와 되돌아보니 먼지 풀풀 날리는 갈밭만을 헤매고 있었음을 깨달았을 때의 허망함 등, 굽이굽이 때마다 사연은 쌓여 나름의 추억은 직조(織造)된다.

 초등학교 4학년 외손녀가 학년 말 종업식을 마치고 친한 친구 몇몇이서 저희들끼리 학교 근처 중국음식점에 가 종업 기념 자장면 파티를 했다고 한다. 까페에 들러 초코랏데도 한 잔씩 주문해 먹었다는 소리에, 솜털 보송한 어린것들의 당돌하고도 맹랑한 짓거리에 놀라고 어이없어 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 아이들은 초콜렛보다도 더 달콤하고 향기로운 값진 추억을 장만했음을 알았다. 나중에 커서 문득문득, 어쩌면 자장면을 먹거나 초코차를 마실 때면, 자연스레 조금은 추웠던 2월 중순 날씨와 함께 깔깔거리며 웃고 재잘거리던 친구들을 정겹게 떠올릴 것이 분명하다.
 추억은 이렇게 일상에서 잉태되고 출산된다. 반추할 아름다운 추억 거리가 많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귀하지만, 인생을 보다 더 풍요롭게 할 것이다.
 여기서 ‘노인은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에 마냥 동의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 말은, 탈기(脫氣)한 채 맥을 놓고 퀭한 눈으로 과거의 어느 지점을 정처 없이 배회하고 있는 것 같은 비생산적인 정지화면이 떠올라서이다. 노인이라고 과거에만 침잠해서는 안 된다. 현재를 살면서 하는 모든 것들, 즉 친구를 만나 담소한다거나 관심 있는 일에 능력껏 참여하는 등의 모든 것들이 추억 만들기의 자산이 된다. 살아 있는 자의 특권인 생산활동을 하는 것이 된다. 오늘 손자녀와 나눈 재미있거나 교훈이 되는 이야기가 오늘을 생각할 내일의 소중한 추억이 되는 것이다.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은 값비싼 것이든 허접한 것이든 모두 귀해서 하나도 마구 버릴 수가 없었다. 현실적으로 성장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꿈을 키워 주고, 친구가 되어 주며, 나날을 행복하게 해 주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물건들이었다. ‘추억’이라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별히 현실적인 삶에 도움을 구체적으로 주는 것은 아니지만, 쓸쓸하거나 외로울 때 즐거운 추억 한 자락을 떠올려 장난감처럼 매만지며 위로 받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일 것 같다. 추억에 가치를 따지거나 호불호(好不好)를 따질 필요가 없다. 무심한 일상에서 기쁘거나 대견한 일을 건져내 의미를 부여하고, 내일 떠올릴 값진 추억으로 삼기 위해 어린 날 장난감 보관하듯 마음 속 보물 창고에 숨겨 두었다가 수시로 꺼내 음미하고 즐긴다면 나름대로 윤기 있는 행복한 나날들이 될 것 같다.
 장수시대를 살아낼 지혜들이 온갖 매체들을 통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심신(心身)의 여력이 있는 한 나이를 초월해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 값진 추억 거리를 매일 생산해 낸다면, 이 또한 풍요로운 노후를 즐기는 한 방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