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 기온 30도를 오르내리며 한가위 음식의 갈무리를 곤혹스럽게 하던 날씨도, 추석이 지나자 계절의 떠밀림을 감당 못하는지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서늘한 기운으로 창문을 닫게 하고 있다.
 하느님의 법대로 정상적인 자연의 순환이 이루어지고 있구나 여겨지니, 공연히 안심하는 마음이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상기온으로 세계 도처에 가뭄과 지진이며 허리케인 소식이고,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늦더위에 때 아닌 폭우 등 기상 이변의 폐해가 만만치 않아 혹시 그야말로 세상 마지막 때의 징조가 아닌가 하고 은근히 켕겨 했던 것이다.
 정상적인 것, 자연스러운 것, 순리대로 행해지고 움직여지는 것에의 감사와 그 가치에 대한 천착이 이루어지고 있는 요즈음이다.

 금년 추석은 철이 너무 일러 명절 수요에 맞춘 햇과일의 수확과 출하가 어렵다는 얘기를 뉴스를 통해 이미 접했던 터였다. 그러나 마트 등 가게에는 사과 배 등 햇과일이 선물용으로 포장되어 잔뜩 쌓여 있는 게 예년과 다름 없었다. 우리 집에도 지인들이 보내온 사과랑 배가 좀 과장해 말해서 어린 아이 머리통만 했다. 어쩜 이렇게 잘 키웠을까보냐고 감탄에 감탄을 거듭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며칠 전 다녀온 우리 시골집 마당의 사과랑 배는 아이 주먹만 한 게 아직 제 색(色)도 옳게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농부들의 수고가 짐작되어 숙연한 기분이 들기조차 했다. 그런데 명절이 며칠 지나니, 사과는 슴벅슴벅 하고 배는 물컹한 게 맛이 없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계절을 이겨 열매를 크게 키우고 빨리 숙성시키기 위해 과수농가에서는 흔히 생장 촉진제를 쓴다고 한다. 그런 과일일수록 쉬 무른다는데, 선도를 오래 유지시키려 왁스 코팅 등을 하나 건강상 좋지 않을 것 같은 의구심만 줄 뿐 효과가 그리 큰 것 같지 않다. 어쨌든 물건을 시장에 빨리 내어 소득을 극대화시키려는 노력은 이해되나, ‘촉진제’란 반칙은 좀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았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빨리 빨리’ ‘남보다 먼저 그리고 많이’ 문화에 젖어 있다. 도무지 자연스럽게 크고, 정당한 절차에 따라 목표한 바를 이루고 차지하게 되는 것을 못 견뎌 한다. 어떤 술수를 쓰고 무리수를 두든 오로지 남보다 먼저 빨리 많이 갖기만을 갈망한다. 자연히 원칙도 규칙도 모두 무시되고, 혼란과 무질서 속에 목소리가 크고 억지가 강한 사람이 승자가 되는 이상한 사회가 되어버렸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순진무구하게 자라며 건강하게 영롱한 무지개 꿈을 꾸어야 할 어린 아이들 마저도 비켜 가지 않고 있다. 온갖 학원으로 뺑뺑이를 돌게 하며 선행학습을 시키는 등 다그치는 일은 일상사가 된 지 이미 오랜, 이를테면 반칙행위에 해당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처음 시작한 몇몇은 혹시 덕을 좀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너 나 없이 한 덩이로 뛰고 있는 작금이니, 아이도 그 부모도 미지의 보장되지 않는 결과물을 위해 숨만 찰 듯싶다. 힘들어 하는 손자녀가 안 되었어서 학원을 좀 줄여 주면 어떻겠느냐는 내 말에, 그러면 제 아이만 낙오한다며 딸도 며느리도 한결같이 아주 단호하다. 빨리 끓는 냄비가 먼저 식고, 콩 등 웃자란 식물은 열매가 부실한 법이다. 차곡차곡 한 계단씩 나이에 걸맞는 학습으로 착실하게 다져진 실력이라야 제 값을 한다는 게 내 생각이지만 메아리가 없음이 아쉽다.

 아직은 따가운 한낮 볕이지만 이따금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이 상쾌하다. 머잖아 황금벌에서는 정직한 땀의 결과물들이 풍요롭게 일렁일 것이고, 촌로(村老)의 구릿빛 얼굴에도 노력의 결과에 대한 자부심 어린 푸근한 미소가 번질 터이다.
 오래잖아 행락객들은 단풍을 찾아 산으로 들로 길을 나설 것이다. 이 가을에야말로 돌아오는 보따리에 가을 정취 뿐 아니라, 질서 정연하게 순환하는 자연의 섭리와, 심는 게 그대로 거두어진다는 이치를 깨달아 담아 왔으면 싶다. 이즈음 아무렇지 않게 사회 곳곳에서 행해지는 억지와 반칙의 씨앗이 잉태한 무질서한 삼류 사회를 후대에 그대로 물려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는 주말엔 벼메뚜기 후두둑 튀는 논둑길을 손자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으며 자연을 읽히고, 정직한 언행과 양보하고 나누며 사는 삶에 대해 이야기해 줄 생각이다. 어린 영혼에 거름을 준다는 마음으로.